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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버메트릭스가 야구를 망쳤을까?

야구-칼럼/SaberMetrics

by 야구고물상 2022. 3. 21.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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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지난 토픽입니다만, 한 커뮤니티에서 한 동안 나왔던 이야기라 간단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이번 오프 시즌 들어서 틈만 나면 세이버메트릭스와 야구 인기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유행이 야구 인기를 갉아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 골자입니다. 그런데 그 글들을 보면 좀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세이버메트릭스가 야구 인기를 망치는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세이버메트릭스의 유행으로 타자들은 공 고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완벽한 착각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가 출루율을 중시하는 건 간단합니다. 안 죽으면 그만큼 많은 기회가 오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타율로 출루율을 올리든 볼넷으로 출루율을 올리든 둘 다 좋아합니다. 과거에 타율을 좀 많이 필요 이상으로 신성시했다 정도가 세이버메트릭스의 입장이라 봐야지, 타율은 완전히 무의미하다가 아닙니다. 볼넷이 재발견되었다고 해서 볼넷 얻어내는 게 타격의 최종 목표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출루율 높다고 에디 요스트(0.254/0.394/0.371)행크 애런(0.305/0.374/0.555) 보다 좋은 타자라고 합니까? 요는 출루도 중요한데, 그만큼 잘 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잘 쳐야 출루도 가능합니다. 배리 본즈나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는 잘 쳤기에 그만큼의 출루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KBO라고 다를까요? 김태균, 양준혁, 장효조 모두 언제라도 3할 타율이 가능한 누구보다 잘 치는 타자들이었습니다. 치는 것과 고르는 것은 서로 공생 관계입니다. 볼을 잘 고르니 타율도 올라가고(출루율도 올라갑니다), 잘 치니까 투수들이 슬슬 피하는 겁니다(출루율이 또 올라갑니다.) 그냥 냅다 공을 고른다고 볼넷을 자동으로 얻어낼 수 있고 출루율이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선수들이 볼을 더 많이 고른다는 것도 사실은 틀렸습니다. 팬그래프에서 살펴보면 2002년 MLB Swing%는 46.3% 였습니다. 이후 45% 대를 한동안 유지했었죠. 2009년은 44.9% 까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2014 시즌부터 2020 시즌 한 번 빼고 다 46% 를 넘어가며, 작년은 47.2%였습니다. 지금처럼 평균 93마일을 우습게 던지고 그 어느 때보다 완성도 높은 미친 변화구를 던지는 강화인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스윙을 안 하고 볼만 골라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KBO는 조금 사정이 낫지만,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전 세대 선수들이라고 공 고르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었거든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토나 트라웃 같지는 않습니다. BB% 또한 딱히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타격의 목표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좋은 타구를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득점하는 것이 바로 타격의 목표입니다. 볼넷을 얻어내거나 하는 일들은 좋은 타격을 하다 보면 나오는 부산물에 가깝습니다. 작년 KBO 리그는 볼넷 너무 많지 않았냐 하실 수 있는데, 작년은 리그 전체적으로 약간 존의 조정에 조금 문제가 있었던 시즌으로 봐야 하지, 그게 타자들이 볼을 너무 많이 골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만약 볼을 많이 골랐어도 그게 리그 전반적인 성향이 볼을 고르는 게 결과를 내는 데 좀 더 유리했기 때문이지, 볼을 고르는 타자들이 전보다 많아져서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볼넷이 많고 적고는 타자들의 선택에 따른 문제이지, 볼을 골라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심지어 정은원 수준으로 스윙을 아끼는 타자라도 볼넷을 얻어내려고 타석에 임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이버메트릭스 지표가 사람들을 야구에서 멀어지게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글쎄올시다? 정도입니다. wRC+를 봅시다. 지금까지 그 해 wRC+가 가장 높았던 선수들의 면면을 찬찬히 뜯어봅시다. 웬만하면 다 슈퍼스타들입니다. 좀 직관이랑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직관을 배반한 선수들 다 팬들이 인정할 만한 장점을 가졌던 선수들입니다. WAR이 높은 선수들도 또한 다 팀의 중추인 선수들입니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하도 wRC+, WAR 같은 이야기만 해서 야구팬들이 떠나간다는 말도 사실 동의하기 힘듭니다. 야구장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야구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구 커뮤니티에 올 정도면 이미 나름 고였다고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가끔 오는 사람들 중에서 세이버메트릭스 애호론자들에게 상처를 받을 사람들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체 비율 중 얼마나 될까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어떻게 계산하는지 모른다고 해서 wRC+나 WAR 같은 지표를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직관은 우리를 배신합니다만, 직관이 괜히 있는 건 아니거든요. 20승을 하거나 0.300을 치는 선수, 30 홈런을 치는 선수들은 웬만하면 WAR이 높고 wRC+ 높습니다. 가끔 나오는 예외들 때문에(푸홀스...) 세이버메트릭스가 야구의 잠재적 팬들을 멀어지게 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 유행으로 경기가 늘어지는가?

 

이건 세이버메트릭스만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19년 9월 28일 뉴욕 자이언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경기는 51분 만에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aseball almanac 참조) 1903년 첫 번째 모던 월드 시리즈는 8경기 평균 1시간 48분이 걸렸고 가장 오래 걸린 경기도 2시간 2분 만에 끝났습니다.(6차전) 그에 반해 1991년 월드 시리즈는 평균 3시간 15분이 걸렸고 2시간 37분이 걸린 2차전이 가장 빨리 끝난 경기였습니다. 다른 사례들을 살펴볼까요?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1946 시즌부터 9이닝 평균 경기 시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페이지에 따르면 1946년 경기 시간은 2시간 7분 걸렸고, 1960년에는 2시간 38분, 1990년에는 2시간 51분, 2020년에는 3시간 7분이 걸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살짝 요동은 있습니다만, 세이버메트릭스 도입 전이든 후든 경기 시간이 쭉 늘어나고 있다는 추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세이버메트릭스에 의한 효과일까요? 이건 다른 스포츠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대표적으로 테니스를 보면 1877년 첫 번째 윔블던 결승전은 3세트 만에 끝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48분밖에 안 걸린 초스피드 경기였습니다. 그에 반해 2012년 호주 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은 1세트가 1시간 20분 걸렸습니다. 경기 제한 시간을 정하지 않은 스포츠에서 경기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건 쉽게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딱히 세이버메트릭스가 경기를 늘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스포츠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고, 점점 더 신중을 가해야 이길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이버메트릭스가 문제점에서 완전히 비껴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렇게 제가 세이버메트릭스를 변호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도 세이버메트릭스가 야구 흥행에 찬물을 끼쳤다는 데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먼저 감성적인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제게는 숫자들이 그런 느낌을 줍니다. 이게 뭔 말이냐면,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개인적' 기준들이 점점 달라지는 걸 보면서 내가 알던 야구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점점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주관적으로, 제 기준에서, MLB 전체 이닝 1위를 하려면 240 이닝 정도는 먹어야 하고 리그 1위도 적어도 230이닝 정도는 먹어야 하며, K/9는 9가 넘으면 초특급, 평균 93마일이면 굉장히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사이 영을 받기 위해 최소 먹어야 할 이닝은 220이닝, 타율 1위는 최소 0.340, 그리고 리그 평균 타율 0.260... 과 같은 숫자들이 제 마음속 기준입니다. 다 현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들이지만 적어도 제가 어렸을 때는 유효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비이성적인 기준입니다. 순전히 주관적 기준들이죠. 1970년대 리그 이닝 1위를 하려면 300이닝을 던져도 명함 내밀까 말까였습니다. 1920년대 타율 1위를 하려면 0.350으로는 웬만해선 안 됐죠. (1923년 베이브 루스는 0.393을 치고도 타율 1위를 못 했고, 통산 타율 0.342 임에도 타율 1위는 한 번 한 것이 전부입니다.) 1950년대가 될 때까지도 K/9가 9를 넘긴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MLB 역사에서 시즌 이닝 당 삼진 한 개를 넘긴 최초의 선수는 1955년 허브 스코어였습니다.) 야구가 변화한다는 걸 인정한다면 이건 문제점에서 재껴도 됩니다.

 

그렇다고 감성적인 면에서만 문제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이버메트릭스는 TTO(Three true outcomes)를 굉장히 중시합니다. 삼진, 볼넷, 홈런이 그것인데, 이 세 항목은 플레이에서 예외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기록들입니다. (거의입니다. 거의.) 그 결과 지금의 야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정적으로 변화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16%대를 유지하던 리그 K%는 2020년대 들어 23%를 넘길 정도로 늘어났는데, 이닝 당 삼진 하나를 잡는 건 이제 당연한 소양이 됐습니다. 볼넷은 조금 줄어들었다지만 어차피 삼진의 1/2이라서 삼진만큼 큰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그리고 삼진과 볼넷에 비해서는 미미하지만 홈런도 대폭 늘어났죠. 그런데 2000년대 초중반은 리그 타율이 0.260을 넘나들었고 리그 출루율도 0.330을 웬만해선 유지했던 리그였지만 지금은 타율 0.245 넘기기도 버거운 게 현실입니다. 원래 정적인 경기였지만 더 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KBO는 MLB와는 궤를 조금 달리하지만 언젠가는 따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야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데이터의 사용은 분명 야구를 변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이 변화가 순전히 세이버메트릭스만의 영향은 아닙니다. 야구 역사를 잘 살펴보면 TTO가 늘어나는 건 야구 역사상 계속 있어왔던 흐름이 세이버메트릭스라는 촉매에 의해 더 빨라진 것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베이브 루스의 출현 이후 파워를 겸비한 타자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왔고, 삼진율도 꾸준히 늘어왔습니다. 아래 그림을 봐도 아시겠지만 TTO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BB%는 나름 꾸준한 편이지만 K%와 HR%는 꽤나 큰 폭으로 증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세이버메트릭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2010년대 이후 그 흐름이 빨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세이버메트릭스가 완전히 이 문제에서 영향이 없다고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세이버메트릭스가 아닌 데이터의 시대에 당연한 흐름일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쌓여 왔던 훈련 데이터에 더해 폭발적으로 쌓이고 있는 투구 데이터와 투수들 개개인의 특성에 관한 데이터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리그 차원의 폭발적인 구위의 증가를 가져왔고, 그에 따라 적응이 이전보다 힘들어진 타자들이 삼진이 늘어나더라도 홈런을 쳐서 한 방을 노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수비 시프트도 한몫을 하기도 했을 거고요. 세이버메트릭스에 돌을 던져 봤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Figure 1. 1910 시즌부터 2021 시즌까지 MLB 전체 타석 대비 TTO 비율 변화. 요동은 있지만 TTO가 높아지는 경향은 변함이 없습니다. 더해서, BB%를 통해 보듯이 과거에 비해 현재 선수들이 공을 더 많이 고른다는 증거 또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안은 있을까?

 

전 솔직히 야구 인기 개선을 위해서는 세이버메트릭스에 돌을 던지는 게 아닌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기 시간도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늘어나는 건 방지해야 겠지만, 7이닝 경기를 하든 12초 룰을 도입하든 야구 경기 시간은 엄청 길 겁니다. 3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여서 뭘 할 건데요? 어차피 시간 단위고 야구 처음 보는 사람들은 지루하긴 똑같을 겁니다. 빨리 끝내고 싶으면 1이닝 경기하면 되는데, 그럴 거면 야구 안 하는 게 더 맞는 선택지일 겁니다. 3이닝으로 하면 또 1시간은 걸리겠네요. 그렇다고 옛날처럼 9이닝 경기를 1시간에 꽉꽉 채워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또 뭐 저래 쉽게 죽냐고 할 거 같습니다. 경기 시간은 생각보다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1930년대 1시간 20분짜리 영화를 보면 참 재미없습니다.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이 감독한 드라큘라를 보면 저게 뭣이다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전개가 엄청 느리죠. 그런데 지금 2시간은 가뿐히 넘어가는 영화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요즘 영화는 MSG 엄청 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드라마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 30분짜리 드라마들 지금 기준으로는 엄청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한 편에 한 시간짜리 드라마들은 훨씬 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재밌습니다. 이런 걸 보면 야구가 더 빨라져야 하는 것은 맞을 수 있겠지만, 그게 경기 시간의 문제일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야구 경기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마케팅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인 리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부적으로 더 많은 스타를 키워야 하고, 더 쉽게 소비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스낵 컬처 형태로 소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게 미래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이 쪽은 정말 까막눈이라 뭐라고 시원한 답변은 못 내놓겠습니다.

 

기사들을 본다면 분명 야구가 변화해야 할 시점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제가 생각하기에 변해야 할 것(혹은 버려야 할 것)은 세이버메트릭스가 아니라, 야구계 전반의 보수적인(혹은 수구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팬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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